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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생각지도 못한 도전

“소록도 100주년을 기념하며”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취약성을 껴안고 살아가는 법

 

평생을 단팥에 바치는 장인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예고편만 보았을 때, 산뜻한 이미지로 포장된 "간밧떼 구다사이(がんばってください: 힘내주세요)"의 메시지를 담은 그저 그런 '따뜻한 일본영화'류에 들어갈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영화는 시종일관 느린 템포 속에서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 꾸중 뒤에 이어지는 침묵으로 공포, 분노, 자기반성 등의 시간을 마련하던 학창 시절의 패턴과도 같았다. 메시지는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위로만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단팥죽처럼 달고도 뜨거운 영화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의 도쿠에는 한센병 환자다. 그녀는 완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한센병 요양소인 다마전생원(多摩全生園)에서 보내며 팥앙금을 만들었다. 도라야키 가게 점장인 센타로는 다소 무심해 보이는 거친 사내로, 그저 빚을 갚기 위해 도라야키를 팔고 있던 그에게 도쿠에가 나타난다. 그녀가 정성을 들여 기다리며, 팥의 이야기를 들으며 만든 단팥으로 도라야키는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가 한센병 환자였다는 소문으로 사람들은 발길을 끊는다.

 

일본에서 한센병에 대한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43년 만들어진 '나병 예방법'이다. 이미 그 이전부터 한센병 환자는 격리 수용되었고 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에도 소록도에 자혜병원을 세워 한센병 환자를 격리하였다. 그러나 한센병은 전염성이 매우 낮은 병으로 나균에 장기간 접촉하였을 때 감염되며 리팜피신 복용시 체내 나균이 전염력을 잃는다. 항나제 복합요법(MDT: Multidrug Therapy)를 통해 1~2년의 치료로 완치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위험한 병이 아니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나병 예방법이 폐지되는 것은 1996년의 일이다.

 

오늘날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한센병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막는 것을 한센병 대응 전략의 주목표로 삼을 정도로 곱지 않은 시선과 비인간적인 실천이 세계적으로 퍼져있다. 무지로부터 오는 감염에 대한 공포와 한센병 환자들이 후유증으로 갖게 되는 겉모습에 대한 혐오가 심각한 차별과 격리로 이어진 것이다.

"해와 달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서정주, <문둥이> 전문)

낮에도 밤에도 몸둘 곳 없는 서러운 존재, 어린 아이 간을 빼먹는다는 괴담으로 추방당한 존재로서 한센병 환자들은 성경에서조차 부정(不正)한 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의 근저에는 동물성에 대한 혐오가 자리 잡고 있다. 마사 너스바움이 <혐오와 수치심>(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2015)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 "혐오라는 감정 속에는 동물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욕구와 결부된, 오염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고, "사회적 실천을 통해 취약한 사람들과 집단을 대상으로 투영"된다.(p.144) 즉 인간의 신체는 유한하며 동물적이기에 혐오가 일정 부분 오염으로부터의 위험을 예방하는 귀중한 진화적 유산일 수 있다.(p.225) 그러나 자신을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의 신체에 혐오가 적용된다면 실제 위험과 무관하게 비합리적인 사고에 기반하여 취약한 집단을 공격할 수 있다. 한센병 후유증으로 생긴 변형이 마치 유한한 신체와 인간성의 퇴락을 의미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면서 한센병 환자들은 인간이 아닌 '괴물'로서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한 너스바움의 해결책은 "누구나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취약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p.703)하자는 것에 다름없다. 여기서 소록도의 '큰할매 작은할매'인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를 떠올렸다. 그들은 1962년 소록도에 들어와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치료하며 43년을 보낸 후 나이가 들어 부담이 될까봐 조용히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특별히 한 것 없다'는 그들의 말에서 본인과 한센병 환자를 구별 짓지 않고 누구나 연약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깊은 겸손의 감정이 느껴진다.

 

이 해결책이 영화에서 더욱 큰 반향을 갖는 것은, 영화 속 또 다른 인물인 중학생 와카나와 점장 센타로가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동적이나마 함께 가해자의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와카나, 센타로 모두 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외롭고 구석에 몰린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한센병 전(前)환자에 대한 차별을 답습하고 있었다. 정말 취약한 이들조차도 다른 이들의 취약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여기에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날리는 도전장이 숨겨져 있다.

 

다행히도 감독이 도전을 풀어내는 방식은 '아파도 해피엔딩'이다. 와카나와 센타로는 전생원에 찾아가 도쿠에를 만나 그녀의 삶을 듣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차별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도쿠에는 특별하지 않더라도 모두 각자 살아갈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단팥에게 그러하듯이, 도쿠에에게 그러하듯이, 센타로와 와카나 모두에게 인생은 각자가 써 나가는 한 권의 책이다. 이렇게 보면 단팥에 귀를 기울이는 장인 정신의 실마리가 풀린다. 꼭 열심히 단팥을 만들고 능숙해져서 장인이 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매 존재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장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팥 장인'의 인생이 아니라 '단팥'의 인생이 제목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당신들의 천국>의 조백헌 원장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는 소설 말미에서 나무뿌리를 파내어 묻혀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주면 된다며 이를 예술이라고 말한다.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이미 그 안에 예술이 담겨있다는 말이다. 조 원장의 모습이 팥에게 말을 걸며 단팥을 '만드는' 것이 아닌 '이끌어내는' 도쿠에의 모습과 어딘지 겹쳐 보인다. 이렇게 보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며 각자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사회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있다. 그저 우리가 정상에 대한 편향 속에서 만들어낸 차별과 배제와 억압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영화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글을 맺어보자. 얼마 전 사소한 부상으로 팔꿈치를 다친 적이 있었다. 그때껏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과 인대의 형태와 위치가 따끔한 통증으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둠 속에서 형체를 드러내듯 부재가 존재를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건강이란 그저 총체적인 망각에 불과했구나, 하고 불현 듯 깨달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존재에게, 나의 취약성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들이 잊히지 않게 항상 기억하고 껴안는 것이리라. 바로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Wild Geese)>가 알려주듯이 말이다. “그저 당신 몸의 연약한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어요.(You only have to let the soft animal of your body love what it lo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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