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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영화

<이다>, 여백의 미학일텐데

<이다>, 파벨 포리코브스키, 2013


1.33:1의 스크린, 예전에는 자연스러웠다고 하지만 이미 몇십년째 잘 쓰이지 않는 비율이다. 아마 영화관에서 봤으면 더욱 강하게 느꼈을 것 같지만 TV 다시보기로 본 터라 사실 실감나지는 않았다. 다만 화면 비율상 꽉 찰 때는 아주 꽉 차 보이고, 텅 빌 때는 아주 텅 비어 보였다. 밀물과 썰물이 오간 자리에 남는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 모래와 생명의 이동. 이 영화는 그런 흔적의 이야기다.

내친 김에 흑백 영화라는 점까지 짚어볼까. 사실 보면서 '당연히 흑백영화여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이런 영화에 색을 입힐 수 있을까. 지나간 시간과 비극에 대해 모자를 벗어야 하며, 성과 속 사이에서 고개를 숙여야 하며, 분노와 용서 사이에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

고증을 위해 흑백을 썼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에도 물론 컬러 영화가 많았지만 사람들은 흑백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가진 자료가 흑백뿐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제강점기나 개화기를 떠올리면 자꾸 흑백의 세계가 생각나는 것과 같다.

다른 걸 다 접어두고서라도 흑백이 아름다운 영화다. 오히려 컬러였으면 많은 걸 놓쳤을지도 모르겠다. 거장의 소묘는 범부의 수채화도 능가하듯이 윤곽과 명도, 채도만으로 모든 걸 다 말하고 있는 영화다. 진실의 정체는 어차피 알 수 없지만 말할 수 있는 한 가장 정확하게 말하겠다는 집념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색이 필요없어서 흑백이다.


인터넷을 보니 유독 결말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과연 안나가 수도원으로 돌아갔을까,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는 당연히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때 나오는 피아노곡이 바로 바흐의 <Ich ruf zu dir, Herr Jesus Christ>니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니 '어느 쪽도 맞고 어느 쪽도 아니다'인 것 같다. 신의 입장에서는 찰나와 같을,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평생인 인생 속에서 끝이 어떻게 맺어질 지는 한 번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추구해 나가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로 안나는 그 어려운 길 위에 서 있다. 하염없이 걸어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꼭 즉각적인 정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없이 사소하나 치열한 고뇌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을 보여주는 단 한 마디. 나 말고도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던 대사가 있다. 

Wanda: Do you have sinful thoughts sometimes?

Anna: Yes.

Wanda: About carnal love?

Anna: No.

Wanda: That's a shame. You should try, otherwise what sort of sacrifice are these vows of yours?

출처: http://www.imdb.com/title/tt2718492/quotes?item=qt2421022

한국어로는 "해보지도 않고서 희생을 맹세하면 무슨 의미가 있니?" 정도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말을 한 이모는 비극의 끝을 보고 난 뒤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안나는 희극의 끝을 보고 현세의 덧없음을 느낀다. 신 앞에서는 희극도 비극도 없이 그저 도도한 시간만이 있을 것이니 맹세를 한다면 이제 해야 할 것이고 맹세를 포기한다 해도 이제 해야 할 것이다. 현세의 명암을 알게 되었다고 쉽게 신에게 회귀할 수 없는 까닭은 이토록 잔인한 운명을 던져주는 분이기 때문이다. 순간 '실존적 선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 끝의 끝에서 모든 걸 걸고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두고 두고 생각이 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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