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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2018 저자가 했던 수업의 내용을 바탕으로 쓰게 된 책이라고 알고 있다. 이 수업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저자가 이 책의 내용을 '공중보건의 역사'로 여기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문장에서 어떠한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해야하는지를 세심히 살핀 결과물이다. 지식들간의 배치에 대하여 깊게 고민하였기에 이 책은 결국 공중보건에 대한 "지식의 사회사"로 태어났다. 섣부른 정책 제안을 던지는 대신 본인의 문제의식을 파고들어가는 자세가 매우 학자적이다. 더보기
김초엽 외, 2018, <한국과학문학상수상작품집> 관내분실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초엽,김혜진,오정연,김선호,이루카 공저 예스24 | 애드온2 문학은 예술의 한 장르이고, 예술은 사회적 현상의 일종이다. 문학이 예술로서의 '순수성'을 향유한다고 해도, 이것이 사회적 제도와 유리된 문학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문단은 '순수문학'을 기준으로 편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다소 동어반복적인 설명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순수문학을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학"이라고 한다. 예술적 가치의 객관적 정의가 누구의 손에도 닿는 곳에 있는 열매가 아닌 이상 예술적 가치 유무를 판단하는 집단에 의해 순수문학이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재 순수문학은 문단에서 인정받는 문학이고, 문단은 순수문학이 통용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더보기
장강명, 2011, <표백> 표백 표백 장강명 저 예스24 | 애드온2 빚을 갚는 기분으로 장강명의 등단작을 읽는다. 보다 일찍 보았으면 좋았겠으리라는 생각과 동시에, 지금 봐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책의 뒷표지와, '추천의 말'의 점령하고 있는 기성 세대의 힘빠진 격려사에 또 한 번 좌절을 느낀다. 그리고 이 글이 또 한 번 좌절을 확인하는 글이 되리라는 확신에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하리라고 직감한다. 공격과 방어는 논리가 다르다. 먼저 공격하는 자는 주도권을 쥔다. 치졸하게 빈틈을 파고들어볼 수도 있지만 전방위적 공격으로 상대방의 혼을 빼놓을 수도 있다. '표백 세대'라는 언명은 치밀하기보다는 마구잡이로 정신 전체를 초토화시키는 돌풍과 같다. 비록 세대론의 외양을 띄고 있지만 기성 세대에게 화살을 돌리기보다는 시대.. 더보기
편혜영, 2015, <선의 법칙> Something for Nothing 선의 법칙 편혜영 저 예스24 | 애드온2 오랫만에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어렵다. 그러나 굳이 어려운 말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좋은 소설은 스스로 좋은 이야기를 해 줄 것이라 믿는다. 내가 아는 한 편혜영은 생의 더럽고 치사하고 뻔뻔스러운 면들에 주목해 온 작가다. 약간의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혐오감은 이질적인 것에 대한 혐오라기보다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혐오, 즉 동족혐오이기 때문이다. 밉고 짜증나고 보기 싫은 상대이지만 바로 그 안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면, 상대를 부정하는 것은 곧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내가 부정되고 나면, 상대를 부정하는 나도 부정된다. 이러한 끔직스러운 교착상태를 편혜영의 작품.. 더보기
시든 별들의 이야기 - 정미경, <가수는 입을 다무네> 정미경의 작품들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정미경 저 아프리카의 별 정미경 저 가수는 입을 다무네 정미경 저 예스24 | 애드온2 정미경의 글은 기품 있었다. 모든 치장을 다 치우고 나면 치졸한 치정에 지나지 않을 내용인데, 그것이 마치 '별'인양, '장미'인양 빛나곤 했었다. 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헛헛한 관계담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발칸의 장미', 그 허술한 무언가의 에센스를, 온기가 되다 만 온기를 건네는 이야기였다. 은 아예 배경을 옮겼다. 정말 멀리 갔다. 모래가 스며드는 나라에서 모든 인물은 서로에게 미로가 되었다. 정미경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쉬웠지만, 누군가에게 정미경의 작품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허술하고 허무한 삶 속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빛나는 것들에 대한.. 더보기
만장 만장 만장이다 나는 조금 침착해지기로 한다 그런대로 비겁해지기로 한다타고투저나 씹어뱉는 라디오가넌 씨발 눈치도 없냐 이 시국에 착오 기만 부정 강박무효로 원용할 사유를 외우며 내 싸움이 아닌 싸움에 왜 나는 흔들리는지 내가 월남에서 말야, 하고다를 바 없이 푸른 소나무누가 시들어버린거야, 아직 피우기도 전인데나다 싶으면 튀어 나온다말이 말로 말하지 못하는 말짓침묵을 아무렇게나 비벼서저 깃발에 발라볼까인정받고 싶었잖아 둥둥 떠가는 리본의 흐름 속에서 배경이 숨을 참는 동안더 높이 올라간다 수천 개의 손바닥나는 여기 왔다. 간다 아 이 세상은 감기 든 몸무너진 봄 조각 슬픈 더보기
작별의 농담(濃淡) 작별의 농담(濃淡) 이제 당신을 모르겠는데세상은 수묵화 한 폭 거울 속 듬성 자란 풀을 깎으며먹먹한 입김에도 어쩔 수 없는 정물(靜物) 산이 산을 잊지 못하고핏기 가신 구름이 두려운 꿈을 꾸고 항상 배는 떠날 줄만 알아서강가에 낚싯대 혼자 떨고 하얗게 질린 밤하늘달은 누워 있는데 별은 서 있네 곁에 한 걸음씩 여백에서 물러날수록밀려오는 공간에 질끈 눈 감고서 당신의 눈으로 그림을 보네온통 먹자국 번질 때까지(2017.01.04.) 이번 달에 더 좋은 시를 쓸 수도 있고 못 쓸 수도 있다.이렇게 올려버리면 전의를 상실해버리니 아마 못 쓸 것 같다.그래도 나는 이 시가 좋아서 이달에는 이걸로 하고 싶다. 수묵화 속의 세상이 마냥 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사실은 외로운 세계일지도 모를 일이다.사무치게, 미칠 듯이.. 더보기
동지 동지 가을은 채 배우기도 전에어느새 몇 장넘어서버린 겨울 하늘이 맨 얼굴로 녹았다가 얼다가남겨진 빛의 속사정어디서 본 듯한자취를 따라이따금 흐린 걸음걸이 눈부신 성질 속으로만전부 사르고그립다는 말조차흔적 없는뜨거운 냉정으로묵묵히 달력을 짓는다 오늘은 동지태양이 꾸는 가장 긴 꿈 (2016.12.21.) *노트: 동지. 못 보는 사람 얼굴은 이 날 꿈에서 보시라. 가장 오래 만날테니. 더보기
모닥불 모닥불 실수로멸망해도 좋아그래 열망해나 볼까나무 이름은 몰라도덧없이 숲으로 들어가한없이 망설일거야바람이 멍들고이파리들이 손사래치는절망도 정말도 아닐 때쯤선홍빛 부채꼴 숨소리 따라천천히 다가가 볼까푸른 안개 너머감정의 피안건너갈 수 없어서책임을 모르는 새벽 먼저침묵에 던져 넣고 피우는 불꽃보이지 않으면 들릴들리지 않으면 보일타오르는 침묵의 노래(16.12.19.) *노트: 쓰는데 오래 걸렸다. 쓰고 끝을 맺지 못해서 놔둔 것을 고치고 놔두었다. 다시 고치고 놔두다가, 오늘에야 끝을 맺었다. 너무 부족해서 답답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갈 요량이 없어 일단 이렇게. 더보기
<이다>, 여백의 미학일텐데 , 파벨 포리코브스키, 2013 1.33:1의 스크린, 예전에는 자연스러웠다고 하지만 이미 몇십년째 잘 쓰이지 않는 비율이다. 아마 영화관에서 봤으면 더욱 강하게 느꼈을 것 같지만 TV 다시보기로 본 터라 사실 실감나지는 않았다. 다만 화면 비율상 꽉 찰 때는 아주 꽉 차 보이고, 텅 빌 때는 아주 텅 비어 보였다. 밀물과 썰물이 오간 자리에 남는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 모래와 생명의 이동. 이 영화는 그런 흔적의 이야기다.내친 김에 흑백 영화라는 점까지 짚어볼까. 사실 보면서 '당연히 흑백영화여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이런 영화에 색을 입힐 수 있을까. 지나간 시간과 비극에 대해 모자를 벗어야 하며, 성과 속 사이에서 고개를 숙여야 하며, 분노와 용서 사이에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증을 위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