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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문학

김초엽 외, 2018, <한국과학문학상수상작품집>

관내분실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초엽,김혜진,오정연,김선호,이루카 공저
예스24 | 애드온2



문학은 예술의 한 장르이고, 예술은 사회적 현상의 일종이다. 문학이 예술로서의 '순수성'을 향유한다고 해도, 이것이 사회적 제도와 유리된 문학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문단은 '순수문학'을 기준으로 편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다소 동어반복적인 설명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순수문학을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학"이라고 한다. 예술적 가치의 객관적 정의가 누구의 손에도 닿는 곳에 있는 열매가 아닌 이상 예술적 가치 유무를 판단하는 집단에 의해 순수문학이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재 순수문학은 문단에서 인정받는 문학이고, 문단은 순수문학이 통용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지시적 정의는 SF소설을 비롯한 장르소설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 밖에 있는 장르소설은 애초에 순수문학과 같은 위치에서 평가받을 기회조차 없고, 바로 그 이유로 '' 바깥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장르소설 작가나 애호가들이 굳이 순수문학 판에 끼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북리뷰 글에서 문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이것이 장르소설을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르소설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까? 장르소설 애호가가 아닌 일반 문학 독자의 시선에서 나만의 답안을 제출하자면, 좋은 장르소설은 장르에 주어진 조건(제약이든 가능성이든)을 살려서 작가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소설이다.

 

여기서 말하는 '장르에 주어진 조건'이란 무엇인가? 장르소설 중에서도 SF소설로 시야를 좁혀서 이야기해보자. 최근 순수문학 판에서 입지를 굳혀가는 장강명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SF배경에 대한 상상력을 펼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구성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 중 배경,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세계를 정교하게 만드는 데 작가의 공력이 주로 들어가고, 독자들도 거기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은 장르라고요. ‘서경(敍景)인 장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봅니다."(출처: 사이언스 타임즈)

 

실로 명쾌한 설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SF 마니아이자 작가이기도 한 장강명은 2015<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으로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믐>'우주 알'이라는 SF적 설정을 통해(아마도 순수문학계에서는 '환상적 소재'라고 부를 것이다) '지금은 모르지만 후일 알게 되는, 그러나 후일 알았을 때는 이미 늦고 만 것들'을 다룬 수작이었다. 배경도 정교했지만 메시지도 그 나름의 색깔과 깊이를 지닌, 좋은 SF소설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SF소설 애호가라면 사실 세계관을 정교하고 풍부하게 구상하는 것으로 충분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르소설뿐만 아니라 순수소설까지 섭렵하는 수많은 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장르소설을 순수소설과의 경쟁 구도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다. 배경이 아무리 신묘, 기이, 정치하다고 한들 순수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장르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차지 않은 한 어떻게 SF소설을 호평해주겠는가.

 

나는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해온 고민이 깊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고민이 문학적 메시지로 형상화되고, 플롯과 인물에 녹아들어가 표현되기를 바란다. SF소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SF소설은 더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 순수소설에 기대하는 바와, SF소설에 기대하는 바(훌륭한 배경 설정)를 모두 충족시키는 동시에 배경 설정이 문학적 메시지 표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장르소설에만 이중, 삼중의 기준을 설정하는 것 같아 불공평한 듯도 싶지만 이것이 일반 독자로서 장르소설을 마주할 때 느끼는 ''이다.

 

조금 오래 돌아서 왔다. 이제 지체없이 <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를 다루기로 하자.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도 매력적이지 못하니, 대상과 가작을 모두 수상한 김초엽 작가의 작품들을 위주로 논한다.

 

<관내분실>은 왜 대상을 수상하였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아쉬운 작품이다. 설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시선이 따뜻하다.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으로부터 잊혀져야 했던 주인공 어머니의 사연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소개된다. '잊혀짐'의 의미가 어머니의 책을 통해, 그리고 인덱스가 지워진 어머니의 데이터를 통해 한층 더 깊게 우러나는 것은 분명 장점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다른 인물들은 얼굴을 잃었다. 얼굴을 잃어버린 한 인물을 구하기 위해, 이 소설은 다른 인물들의 얼굴을 지워야했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평면적이고 밋밋한 이야기 전개가, 결말을 지나치게 뻔하게 만들며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 남동생의 행동을 단순화시켰다. 그럼에도 <관내분실>은 아래와 같은 고민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음미할 만한 SF소설이다.

 

죽은 이들의 두뇌를 데이터 형태로 '도서관'에 보관하여 다시 만나볼 수 있게 된 사회에서 발생하는 존재론적 문제는 그 데이터가 영혼이냐 아니냐이고, 실천론적 문제는 누가 누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이다. 작가는 '영혼'의 문제에 더욱 집중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여기서 기억/망각의 문제를 다루고 싶다.

 

우리에게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일이 각별한 이유는, 그들을 다시는 만나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죽은 이의 입장에서는, 예외적 인물이 아니고서야 죽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이 지구상에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는다. 살아있을 때는 활동이 가능한 만큼 기억투쟁이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진 않을 수 있지만, 사후에 벌어지는 기억 투쟁은 말 그대로 존재 여부를 결정짓는다.

 

만약 내가 죽어서, 누군가가 나를 '도서관'에 모셔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를 불러내지 않는다면 나는 사실상 소멸한 것이다. , <관내분실>에 나오는 '도서관' 속의 데이터는 사실상 기억의 외화이며 물화이다. 나를 기억해주는 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도서관'의 데이터 열람이라는 형태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관내분실>에서 일어난 것처럼 인덱싱, 즉 표지가 사라지게 된다면 기억은 길을 잃고 만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머릿속 어딘가엔 분명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표지란, 즉 이름이란 기억이 깃들 수 있는 하나의 장소인 셈이다.

 

이름 붙이기는 곧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관내분실>의 주제라는 렌즈를 통해 본다면 기묘하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주인공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를 불러줄 하나의 이름, 그녀가 담길 하나의 방이었다. 이는 SF적 설정이 문학적 메시지의 전달과 적절하게 결합된 경우로 보이며, 아마 <관내분실>이 대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생각된다.

 

같은 작가의 가작 수상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개인적으로는 더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 자체는 진부할 수 있지만 훨씬 더 서스펜스가 느껴졌고, 설정이 갖고 있는 힘이 보다 뚜렷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설정은 무엇보다 '현실적'이다. SF소설을 쓰다보면 과학기술의 발전상에 도취될 우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소설에서는 기술이 사회경제적 조건 내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거시적 스케일에서 과학기술이 자본의 논리에 영향받아 채택되고 폐기되는 과정이 미시적 스케일에서 어떤 비극을 낳았는지를 묘사하는 것은, 아마 작가 스스로가 과학기술인이 아니었다면 쉽게 기대하지 못할 내용이다. 아마 그녀에게는 이 설정을 만들어내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을 것이며,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순간을 우주적 스케일로 적절히 끌어올린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작가 인터뷰)

 

다른 작품들까지 건드리기에는 지면이 좁고 여러분은 바쁘다. 그외에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였고 다른 작품들은 다소간에 설정에 이야기가 압도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한국의 SF소설을 이 책 한 권만 가지고 평가하는 일은 부당하다. 게다가 SF소설이라고는 거의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평가한다면 더욱 더 부당하다. 그러니 이 서평은 매우 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가 SF소설집을 읽고 서평을 쓰게 되었다는 게 한국문학 전반에 있어서도, 한국 SF문학에 있어서도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SF소설은 그 설정의 강력함으로 인해 순수소설에서 제기하기 어려운 문제를 내놓을 수 있는 힘이 있다. SF장르 애호가가 아닌 이들은 여전히 SF소설에 거리감을 느끼겠지만 SF소설이 가진 생명력이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SF소설을 읽게 하는 일이 이미 일어났다(장강명의 <그믐>에서 그러했듯이). 앞으로 나는 더 좋은 SF소설들을, 굳이 '장르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도 만나게 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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