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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문학

장강명, 2011, <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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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저
예스24 | 애드온2

빚을 갚는 기분으로 장강명의 등단작을 읽는다. 보다 일찍 보았으면 좋았겠으리라는 생각과 동시에, 지금 봐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책의 뒷표지와, '추천의 말'의 점령하고 있는 기성 세대의 힘빠진 격려사에 또 한 번 좌절을 느낀다. 그리고 이 글이 또 한 번 좌절을 확인하는 글이 되리라는 확신에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하리라고 직감한다. 

공격과 방어는 논리가 다르다. 먼저 공격하는 자는 주도권을 쥔다. 치졸하게 빈틈을 파고들어볼 수도 있지만 전방위적 공격으로 상대방의 혼을 빼놓을 수도 있다. '표백 세대'라는 언명은 치밀하기보다는 마구잡이로 정신 전체를 초토화시키는 돌풍과 같다. 비록 세대론의 외양을 띄고 있지만 기성 세대에게 화살을 돌리기보다는 시대를 탓함으로써 이 논쟁이 불가해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미 막스 베버가 iron cage의 비유에서 경고한 바 있는, 분화/전문화의 끝에 '완성된' 사회는 개인에게 일정한 자유를 허락하는 대신 그 외의 자유를 금지한다. 스스로에게서 말미암는 자유가 아닌 허용되고 통제되고 억지되는 자유다. 이것을 문제 삼는 것은, 사회의 체계에 대한 총체적인 대안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 일종의 반칙이다. <표백>은 반칙에 대한 공공연한 금기를 어기고, 모두가 수용하던 절망을 링 위로 올린다.

굳이 이 거대한 좌절을 '청년' 문제로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 어쩌면 르네상스가 끝나고 근대를 맞던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누군들 다빈치가 되기를 꿈꾸지 않았겠는가? 역사를 통틀어 정말 '역사의 주인'이 되는 삶은 아주 예외적인 소수에게만 허용되었다. 다만 이 보편적인 문제가 논의의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맥락 속에서 어떤 논리를 갖고 구체화되는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에 존재했던 무기력증에 대하여, '청년'과 '완성된 사회'의 갈등이라는 프레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다소 치사한 문제제기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 전반의 관료화가 수직적 인간관계에 착종되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보다 합당한 비판은 그 운용 방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보다 미시적인 실천 속에서 구조와 행위자의 역학을 살펴야 하며, 경직성과 순응성을 타파할 수 있는 작동 방식을 찾아야 한다. 정말로 이 시대에 성장이 계속되지 못한다는 전제가 맞다면, 이 답답한 삶에 0점을 맞추고 새로이 무게를 재 나가야 한다. '구조 때리기'는 속시원한 프로파간다일지는 몰라도 거기서 더 나아가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장강명이 선제공격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그리고 나는 장강명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기로 했다.